2023
일이든 공부든 하루에 열몇 시간씩 몰두할 수 있던 시절은 끝났다. 이제는 돌봄과 배움을 병행하며 분 단위로 시간을 관리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짧게 분절된 시간을 그러모아 남들 하는 만큼 해내려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집중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올해의 배움은 분투의 연속이었다.
돌보는 사람
2년 전의 나는 배움을 직업으로 삼았었다. 요즘은 누가 내 직업을 묻거든 "주부"라고 답한다. 구시대적 어원이 싫어서 "가사 노동자"라고 답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무슨 뜻인지 다시 물어오는 경험이 반복되어서 이제는 그냥 "주부"라고 하고 만다.
가사와 돌봄이 내 삶의 가장 큰 부분으로 자리하게 된 것은 모두 이 아이, 두부 때문이다.
이름 모를 밭에 묶여있다가 지난 4월에 구조되었다. 어린이다운 극성맞음, 어린이답지 않은 총명함을 모두 가졌다. 크고 사납다는 편견에 시달리지 않을 세상으로 안전히 떠나보내려고 잠시 맡았었다. 지금은 그 세상을 내가 안겨주겠다는 마음으로 품고 산다. 덕분에 하루하루가 다이나믹한 예측 불가의 사연들로 가득하다. 함께 한지가 고작 수개월인데 이 아이가 없는 삶을 벌써 상상하기 어려워졌다.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 반려인과 나의 심신만 돌보면 되었던 집안일의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3세 아이의 지능으로 일생을 살아가며 말도 통하지 않는 생명을 키우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산책과 배변과 위생관리, 식사, 대인/대견 사회화, 매너 수업, 보호자 교육, 놀이, 그리고 이따금 필요한 의료검진으로 매일 수백 분의 시간이 산발적으로 녹아내렸다. 그만큼의 시간을 들이고도 보호자로서 미흡하다는 자책이 반복되었다.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이런저런 소리를 참 많이 들어왔다. 돌아보니 다 허튼소리였다. 가사와 돌봄의 세계에서 일과 삶은 그냥 한 덩어리다. 마구 엉켜 덩어리진 사건들의 적층물이다. 매일 예고 없이 생겨나는 적층물을 치워내려면, 결국 내게 허용된 시간을 이리저리 쪼개어 어떻게든 분할 정복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하루가 살아진다.
배우는 사람
일이든 공부든 하루에 열몇 시간씩 몰두할 수 있던 시절은 끝났다. 이제는 돌봄과 배움을 병행하며 분 단위로 시간을 관리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짧게 분절된 시간을 그러모아 남들 하는 만큼 해내려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집중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올해의 배움은 분투의 연속이었다.
- HarvardX Computer Science for Web Programming 전문 자격 취득 (1월-4월)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컴퓨터과학과 졸업 (2월)
- ChatGPT API 기반 퀴즈 앱 개발 및 배포 (4월)
- LLM 앱 경진대회 참가: AI 기반 뉴스 모니터링 보고서 생성 및 질의응답 솔루션 개발 (8월-9월)
- 우아한테크코스 6기 프론트엔드 부문 프리코스 수강 (10월-12월)
- 프로그래머스 웹 풀사이클 개발 데브코스 수강 (11월-12월)
- GCP Associate Cloud Engineer 자격 갱신 (12월)
GPT를 비롯한 거대언어모델(LLM)의 대중화를 빼놓고 올해의 기술 동향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생성 AI의 격랑이 몰아치는 세상에서 물결 아래 휩쓸리는 사람으로 남기는 싫었다. 한철 장사꾼처럼 느닷없이 새 시대의 구루 행세를 하는 분들에게 휘둘리고 싶지도 않았다. 미약하게나마 스스로 파도를 타고 오르내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올해 이어온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공부, ChatGPT API 기반 퀴즈 앱 개발, LLM 앱 경진대회 참가는 모두 시대의 파고를 넘어보려는 작은 몸부림이었다.
- ChatGPT를 비롯한 대화형 AI 서비스에서 더 좋은 결과물을 얻게 해주는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Prompt Engineering)
- ChatGPT에서 채팅 만으로 웹 애플리케이션을 만드는 프롬프트 활용 사례와 시사점
- OpenAI API를 애플리케이션의 백엔드 데이터 에이전트로 활용한 KinoQuizAI 개발 후기
첨단의 기술로 금칠한 서비스라도 고객에게 매력적인 사용 경험을 주지 못한다면 성공하기 어렵겠다는 것을 AI 퀴즈 앱 개발 도중에 절감했다. 이때를 계기로 서비스와 사용자가 만나는 접점을 디자인하고 구현하는 작업에 본격적인 관심이 생겼다. 올해 4분기에 참여한 우아한테크코스의 프리코스, 그리고 프로그래머스의 풀스택 데브코스는 모두 웹 프론트엔드 기술의 핵심 언어인 JavaScript를 익히기 위해 시작한 것이다. 이 즈음부터 나의 장래 목표도 '클라우드 엔지니어'에서 '클라우드도 다룰 줄 아는 웹 개발자'로 바뀌었다.
수련하는 사람
격변하는 생활을 버티면서 찰랑거리는 정신을 붙들려면 몸의 그릇을 더욱 키워야 했다. 폐허 위에 흙을 덮고, 땅을 고르고, 새 주춧돌을 심는다는 생각으로 최현진 관장님의 지도를 받아 수년간 케틀벨 수련을 이어왔다.
그리하여 지난 10월에는 StrongFirst에서 주관하는 SFG Level 1 지도자 자격을 얻었다. 생애 첫 턱걸이를 성공한 지 2년 6개월 만의 일이다.
가르침을 업으로 생각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지도자 자격이라는 말의 무게가 버겁다. 그저 성실히 수련하는 과정에서 얻은 작은 기념비로 여기려 한다. 30년 넘게 운동을 먼 산 보듯 해왔던 사람도 성실히 정진하면 이런 일도 해낼 수 있다. 그걸 증명한 것에 만족한다.
(조금씩) 전진하는 사람
2024년 2월부터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다. 우아한테크코스의 6기 프론트엔드 교육생으로 내년을 보낼 예정이다.
본래는 프리코스의 경험을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웹 프론트엔드 기술은 물론이고 백엔드 영역과 클라우드 기반 인프라 서비스까지 아우를 수 있는 JavaScript 및 슈퍼셋 언어의 활용 능력을 키우고 싶었다. 사전에 따로 준비한 것은 없었다. 4주 동안 맨땅에 헤딩하듯 이리저리 좌절하면서 많이 배워가자는 생각만 했다. 지원서에도 그동안 공부하고 쓰고 만들면서 느꼈던 점만 간추려 적었다. 증빙자료에는 패기만만하게 깃허브 프로필 주소만 넣었다.
프리코스를 거치며 겪은 변화는 생각보다 컸다. 매주 공통의 문제를 두고 수천 명이 코드로 대화하며 서로의 지식을 나누는 경험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초심자로서 내가 한 일은 그 현장에서 귀동냥하듯 얻어온 지식과 피드백을 매주 이어지는 과제물에 녹여내는 것뿐이었다. 일주일 동안 온 힘을 다해 만들었던 코드가 그 다음주엔 전생의 못난이 유물로 전락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단기간에 이토록 큰 스텝 업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이래저래 아는 게 참 없는 사람이라 그랬겠지. 그래서 본 교육 과정은 어떠할지 궁금하다. 더 바쁘고 치열할 것이다. 가끔은 괴롭겠고. 하지만 이번에도 가능한 만큼만 조금씩 전진하면 그만이며 아니어도 괜찮다는 태평한 마음씨로 다닐 것이다. 매사에 남들과의 격차를 의식하며 자신을 다그쳐봐야 그 귀결은 자기학대일 뿐이다. 마흔이 코앞에 다가오는 동안 몸으로 익힌 진리 중 하나다.
그리고,
돌봄, 배움, 운동 중 어느 하나도 놓지 않으려고 애썼던 해였다. 이게 가능했던 건 모두 사랑하는 반려인과 귀여운 새 가족, 그리고 주변의 은인들 덕분이다. 모두가 아낌없이 건네준 격려가 막막한 앞날을 걱정하며 고립무원의 길에 빠지려는 나를 다잡아 주었다. 이전에도 말했듯이, 나의 모든 용기는 이들에게서 얻은 것이다.